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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반] 페스탈로찌(1745~1827)
이름
엄민섭
작성일
2018-11-23


1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찌

(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5년 ~ 1827년)

 


 

1. 일생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찌는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호반에서 요한 바프티스트와 수잔나 사이에서 1745년에 태어났다. 그의 나이 9세때에 그의 부친 요한 바프티스트는 1756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페스탈로찌는 어린 시절,종교적 감성과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인 어머니 수잔나로부터 인생과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항상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며 어려운 시련기에도 언제나 봄빛과 같은 역활을 감당해 주었기에 페스탈로찌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는 언제나 그의 마음에 가정의 의미가 맑고 따뜻함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1769년 9월 30일 게비스돌프에서 안나와 결혼한 그는 노이호오프에서 시작한 그의 첫번째 사업에 온갖 정열을 쏟아서 몰두한다. 이 사업은 1770년에 태어난 첫아들 야곱의 육아일기를 쓰면서 아들의 교육에 힘을 쓰면서 동시에 빈촌인 빌의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짐으로 시작되었다. 20명 남짓한 아이들을 모아 시작한 사업은 나중에는 80명이 넘어서게 된다. 그는 각 어린이들의 개성을 관찰하였으며, 이러한 관찰기록은 교육사상에서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첫번째 사업이 점점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1780년에 이르러 그의 사업의 자원은 완전히 고갈되게 되자 페스탈로찌는 무일푼으로 첫번째 교육의 사업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같은 실패는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아내 안나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었으며 주변에서 호의를 가졌던 사람들은 이제 그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스탈로찌의 영혼은 비로소 종교적인 방향으로 좀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즉 교육자로서의 자각이 생활환경과 어려움에 의해 절망의 상황에 처하자 거기에서 종교적인 자각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첫번째 교육사업의 실패 뒤에 쓰여진 [은좌의 황혼]은 종교적인 글로서 비록 세간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저작활동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후에 [은자의 황혼]을 부연한 [리하르트와 게르트루트], 특히 제 1권은 소설로써 인정을 받게 된다.

1793년 피히데가 시인 바게젠,그리고 저작자 펠노우과 함께 페스탈로찌를 방문한다. 후일 이 만남은 피히데에 의하여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글로써 표현되었으며, 페스탈로찌는 피히데에게 자극받은 것을 1797년의 [탐구]로서 나타내었다.

    1798년에 정부는 집이 없거나, 가난으로 집이 없는 것과 거의 같은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슈탄쓰에 고아원을 짓기로 결정하고 페스탈로찌를 그 고아원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 곳의 환경은 열악하였으며 그를 도와줄 사람은 오직 식모 한 사람뿐이였다. 이러한 외적인 어려움 외에도 어린이들의 건강상태, 심적인 불안상태는 페스탈로찌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교육의 참 사상을 바탕으로 진행하여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는 그의 교육사상에 따라 어린이들은 점차로 안정과 정상을 되찾아 갔다.

    그러나 1799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슈타스 고아원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으며, 대신 병자들은 수용하는 곳으로 바뀌어 진다. 이같은 페스탈로찌의 교육사상은 전 세계에 인정을 받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교육사업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27년 2월17일 81세의 나이로 노이호오프 근교 부르크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2. 업적
    1798년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스위스로 밀려왔을 때 슈탄스에 고아원을 설립, 전쟁고아를 돌보았다. 그후 부르크도르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세워 독자적인 교육방법을 실천하다가 만년에는 다시 노이호프로 돌아갔다.


    당시의 유럽 사회를 분석하여, 계층간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은 정당한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민중에게 바른 지성의 힘을 기르게 하면 민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인간학교의 이상을 제안하였다.

    또한 바른 지성의 힘을 체질화하기 위해서 형·수·어의 개념을 직관적 경험을 통해서 부여해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인간에게 내재하는 자발성·자기활동에 의해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기초도야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펼쳤다.

    도덕적 형성의 근원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믿음의 관계에서 찾으면서 생활이 향상된다는 입장을 역설하였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새겨진 묘비명은 그의 교육에 대한 모든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 대표적 저서

    농민학교 운영에 실패한 후에 쓴 교육선언 《은자의 황혼》(1780),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불후의 교육소설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1781~1787), 그의 근본적인 철학적·인간학적 사상이 담긴 《인류발전에 있어서 자연의 운행에 대한 나의 탐구》(1797), 교육방법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한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1801) 등이 있다.


    또한 만년의 저서 《백조의 노래》(1826)에서는 교육이상으로서 전인적·조화적 인간발달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이들 저서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신에 대한 순수한 신앙이 그의 생활과 사상의 바탕이었음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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